해방의 엑소시즘
현대인에게 노동은 패러독스이다. 산업화 이후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노동은 생존을 위한 필연이었고,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중산층 계급이 등장하여 교육이 사회적으로 중요시되면서 학생이라는 새로운 신분이 탄생했고, 노동자 계급에게 일시적 비노동 상태로의 접근이 가능해졌다.
학생 신분의 등장은 노동의 필연성을 흔들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서 친구를 사귀고, 지식을 학습하지만 생존을 위한 노동은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애매모호한 상태가 인간에게 노동하지 않는 삶을 꿈꾸게 한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고 고학력 백수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사회는 노동하지 않음을 정상이라 하지 않는다.
혹시 사람이 노동을 하지 않는 상태가 정상인 것은 아닐까? AVICII의 <Levels> 뮤직비디오는 반복적인 노동과, 사회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주제를 전자음악으로 풀어낸다. MV 속 주인공, 다시 말해 현대인을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에 비유하여 현대인의 노동과 일상의 고단함,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을 전자음악과 춤으로 강렬하게 전달한다.
현대인의 삶을 '끝없는 노동의 반복'으로 정의한다면, - 다시 말해서 '시지프스적 삶'이라 생각한다면 - 이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가들은 전자음악을 제안한다. EDM의 기본 구조는 본질적으로 반복적인 루프(Loop) 구조를 가진다. 4분의 4박자의 드럼이 반복되고, 멜로디가 반복되며 청취자에게 최면적이고 몰입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EDM의 핵심은 '반복'인데, 전자음악은 반복을 지루하게 쓰지 않고 몰입되고 고조되는 '환상적 경험'을 유도하기 위해 활용한다.
반복의 의미를 완전히 전복시킨다는 관점에서 EDM은 시지프스적 삶과 같은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시지프스적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은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지루한 일상의 반복과 일탈의 순간은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현대인이 '노동의 패러독스'에 직면해있기에 파티가 중요하고 쾌락이 신성시 여겨진다. 회사 건물 안에서 'AVICII'에 귀접한 <Levels> 뮤비 속 주인공처럼, 이 노동의 굴레를 인정하고 직면하는 존재가 '참을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고, 해방되는 순간에서 우리는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DJ Snake & Lil Jon의 <Turn Down for What>은 <Levels>보다는 조금 더 강력하고, 추하다. 뮤직비디오에서 '춤'은 단순한 신체의 움직임을 넘어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는 억압이 해소되는 순간처럼 보이기 때문에, 음악과 춤은 마치 엑소시즘적 행위처럼 보여진다.
현대 사회에서 '아파트'는 말 그대로 모든 욕망이 응축되어있는 공간이다. 한국에서는 경제적인 욕망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 층간소음, 이웃과의 다툼 등 - 통제와 억압의 상징이기도 한 양면적인 물질이기도 하다. 옥상에 홀로 서있는 동양인 남성(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인물의 인종적 배경과 성별은 아주 중요하다)이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엑소시즘적 상태'에 돌입한 채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뚫고 가장 최상층에 사는 아랍계 여성의 방으로 침투한다. 여성은 위협을 느끼고 도움을 요청하려 하지만 금새 남성의 강력한 욕망과 마주하게 되고, 공포는 수용의 단계로 나아간다. 뮤직비디오는 이러한 욕망의 전이를 마치 전염의 메커니즘으로 비유하고 있다.
욕망이라는 전염이 확산되면, 집단적인 상태가 된다.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아주 관습적인 행위로 저녁 식사를 시작하려던 가족에게도 이러한 욕망이 퍼지게 되는데, 뮤직비디오에서 타인의 춤에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는 순간의 표정과 그 순서또한 매우 흥미롭다. '아버지, 어머니, 딸'로 구성된 3인 가족에서 어머니가 먼저 욕망을 발견하고, 어머니의 추한 몸사위에서 그 다음으로 딸이 욕망을 발견하는 순서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Turn Down for What>의 뮤직비디오에서 느낄 수 있는 '어글리'는 욕망과 엑소시즘의 메커니즘을 더욱 강렬하게 드러내는 핵심적 형용이다. 현대 사회에서 타인의 욕망은 종종 아름답고 품위 있는 방식으로만 표현되기를 요구받는데, 만약 추함을 욕망의 본질이라 주장한다면 이러한 사회 규범에 전면적으로 저항하겠다는 정치적 위치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함의 미학은 나에게는 '엑소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엑소시즘에서의 추함은 단순히 불쾌한 것이 아니라, 억압된 감정이 해소되고 정화되는 일련의 과정과도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추한 것들이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움의 부재가 아니고, 미적인 해방과도 같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해방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면, 뮤직비디오 속 주인공들처럼 춤과 욕망이 전염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