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팬서와 아프로퓨처리즘
예술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술가들은 창작 행위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작품에 담아내고, 감상자들을 공감시킴으로써 그것을 더이상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닌 사회적인 메세지로 탈바꿈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어떤 메세지를 담을 것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곧 예술가들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활동과도 같다.
문화콘텐츠 생산자들은 그것이 굉장히 까다로운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내러티브 속에 메세지를 담기 위해 노력한다. 철저히 백인 중심이었던 할리우드 영화 산업도 다인종으로 배우를 구성하려 노력하고, 게임 업계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게임 서사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언제나 소비자들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발생시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가 계속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결국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수행하고 싶은 어떤 정치적 동기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 10억 달러 이상의 흥행을 기록한 마블 스튜디오의 메가 히트작 ‘블랙 팬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아주 선명하게 ‘흑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의 거의 모든 부분이 흑인과 관련된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주제 또한 단순히 흑인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 걸쳐서 흑인 인권 문제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동시에 영화가 ‘슈퍼히어로’라는 대중문화의 최중심부에 위치한 장르로써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이루어냈다는 점이다. 본 글에서는 ‘블랙 팬서’가 어떤 방식으로 흑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와 동시에 크게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블랙 팬서’는 SF 분야의 한 갈래인 아프로퓨처리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아프리카와 퓨처리즘이 결합된 이 용어는 1994년 마크 데리에 의해 처음 사용된 용어로, 흑인에 대한 현실 세계의 차별에 의문을 제기할 목적으로 SF, 테크노컬쳐, 마술적 리얼리즘 등을 조합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흑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SF적인 이미지를 차용했던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상상하는 미래의 모습에 흑인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흑인들이 공감할 수 없는 백인 중심의 미래사회에 반기를 들고, 첨단 과학과 기술적 이미지가 집약된 공간에 흑인 문화를 등장시킴으로써 아프로퓨처리즘은 흑인 문화의 기원과 미래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일종의 저항예술이 되었다.
‘블랙 팬서’ 또한 SF적 공간과 배경에 흑인 문화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아프로퓨처리즘’적 컨셉을 충실히 수행했다. 주요 배경이 되는 와칸다는 첨단 기술로 무장한 유토피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원시 유토피아, 즉 아프리카 토착 문화와 부족 사회의 모습이 함께 융합된 공간이다. 흑인 전통 문화와 기술 고도화 사회가 서로 대립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와칸다는 아프리카, 그리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대표되는 흑인 모두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이는 두 가지 효과를 가지는데, 하나는 종종 도외시 여겨졌던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들을 포용할 수 있다는 점이고, 나머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자신의 기원에 대해 상기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블랙 팬서는 영화 내내 이 두 가지 차원의 흑인을 대표할 수 있는 이미지를 ‘히어로’의 모습을 통해 의도적으로 구분하고 적절히 혼합한다. 티찰라로 대표되는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 그리고 킬몽거로 대표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히어로와 안티-히어로로 대비시키며, 두 인물의 등장 배경부터 음악, 억양과 제스쳐, 심지어는 디테일한 헤어, 메이크업까지 달리 표현한다. 전통과 현재, 아프리카와 미국,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를 두 캐릭터가 적절하게 대표하고 있다는 점은 관객으로 하여금 히어로-안티 히어로 대립 서사에 몰입하게 하며, 이는 ‘아프로퓨처리즘’이 추구하고자 하는, 미래를 통해 과거를 사유한다는 컨셉을 히어로 장르의 컨셉으로 녹여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블랙 팬서’는 내러티브가 담고 있는 메세지 못지않게 다양한 미학적 시도를 통해 수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흑인 문화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대중문화 장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힙합/알앤비 기반의 이미지들과, 에스닉한 느낌을 주는 아프리카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한 이미지들은 모두 서로 적절히 대비되거나 교차되면서 그 매력이 드러난다. 동시에 히어로물 또는 SF 장르의 관습을 적절히 지키고 비틀었기 때문에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되었다.
와칸다 부족의 등장인물들은 아프리카 부족의 전통의 아름다움을 잘 살리면서 화려한 색채의 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심지어 히어로들의 코스튬 또한 기존 마블 시네마틱의 기계적인 디자인과는 다소 다른, 독창적인 컨셉으로 디자인되어있다. 블랙 팬서를 상징하는 발톱 문양의 디자인이나 복식 표면의 패턴 디자인은 퓨처리즘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아프리카 전통 문화를 충분히 믹스매치할 수 있다는 창의적 제안이며, 이를 통해 백인 중심 문화에서 소외되었던 흑인의 아픈 역사를 예술을 통해서 치유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동시에 안티히어로인 킬몽거로 표현되는 스트릿 패션과 대비되며 흑인 문화를 상징하는 두 가지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제안한다. 이러한 독창적인 의상디자인은 히어로물의 컨셉에 부합하면서도 다른 히어로물들과 차별점을 둘 수 있는 ‘블랙 팬서’만의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블랙 팬서’는 음악에서도 전통적인 사운드와 트렌디한 흑인 음악을 적절히 믹스한 사운드트랙을 구성하여, 음악으로써의 ‘아프로퓨처리즘’ 또한 구현하였다. 블랙팬서 오리지날 사운드트랙은 루드비히 괴란손 음악감독의 노력으로 직접 수집한 아프리카의 악기 소리가 힙합 사운드와 믹스되어 ‘블랙 팬서’의 아프로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연출한다. 또한 주류 흑인 힙합/알앤비 아티스트들의 참여로 구성된 ‘Black Panther: The Album’은 트렌디한 사운드로 흑인 문화가 중심으로 자리한 퓨처리즘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는 영화를 소재로 한 컴필레이션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높은 미학적 성취를 거둔 ‘아프로퓨처리즘’ 앨범이라는 점에서 더욱 좋은 평가를 할 수 있다. 켄드릭 라마라는, 흑인 인권 문제에 대한 내러티브를 자신의 디스코그라피 내내 활용함과 동시에 그것을 대중적인 성공으로 이뤄낸 아티스트를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시켰다는 점에서도 ‘블랙 팬서’가 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선명히 알 수 있다.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영화 다방면에서 흑인 문화에 대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비슷한 작품 사례로 최근 소니 애니메이션 영화인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를 ‘블랙 팬서’와 비교할 수 있다. 이 작품 또한 흑인 히어로인 ‘마일스’를 내세워 최근 주류 대중 문화인 힙합/알앤비의 흑인음악에서 파생되는 이미지로 영화 전체를 구축하였다는 점에서 ‘블랙 팬서’와 비교했을 때 재밌는 지점들이 존재한다.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는 화려한 영상미 속에 주류 흑인 대중문화를 흑인 히어로와 함께 내세워 색다른 스파이더맨을 창의적인 애니메이션 효과들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다만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는 똑같이 흑인 SF 히어로물임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맨의 평행 우주 컨셉과 코믹스의 느낌을 훼손하지 않은 채 흑인 히어로의 서사를 구축하긴 했으나,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대표하는 이미지들로만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블랙 팬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프로퓨처리즘 내러티브와는 구별된다. 여담으로 스파이더맨의 사운드트랙 또한 블랙 팬서와 유사하게 주류 흑인 힙합/알앤비 아티스트들의 참여로 제작되었는데, ‘Spider-man: Into the Spider-Verse’는 당시 가장 트렌디한 힙합 아티스트인 포스트 말론이 참여했고, ‘Black Panther: the Album’은 가장 미국 사회에 영향력 있는 메세지를 던지는 힙합 아티스트인 켄드릭 라마가 참여했다는 점이 두 영화의 차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재밌는 부분이다.
‘블랙 팬서’는 이렇게 다양한 차원에서 아프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흑인들의 마더랜드라 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이미지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대중문화 속 흑인들의 이미지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면서 아프로퓨처리즘의 새로운 대표작이 되었다.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흑인들이 겪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첨단 기술의 도움, 그리고 부족 사회 정신의 회복이라는 두 가지 가치가 모두 필요하다는 점을 다양한 수단으로 유치하지 않게 설득하고 있다. 많은 역사적 아픔을 지닌 흑인들을 SF 세계관 속 주인공으로 상정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포함한 모든 흑인들을 영화 속으로 끌여들었다. SF와 슈피히어로 장르적 특성과 관습을 충분히 구현하면서도 흑인 인권 문제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의미있는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블랙 팬서가 아프로의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 사용한 여러가지 수단들은, 어떤 메세지를 던지고자 하는 모든 예술가에게 좋은 표본이 될 것이다. 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는 모든 수단에 대해 고찰하고, 일치하는 방향성을 꼼꼼히 가져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Black Panther: the Album’처럼 영화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요소들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줄 수 있다. 또한 정치적인 내러티브를 가진 영화가 동시에 트렌드를 선도하는 매력적인 이미지를 같이 구성했을 때 엄청난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블랙 팬서’가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