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수
괴수를 욕망하는 리듬 게이머
2007년 경 당시 <EZ2DJ>의 상징적인 플레이어인 CSM*(본명 조성민)이 온게임넷의 프로그램 <두더지(D the G)>에 출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리듬 게이머 사이에는 엄청난 실력의 플레이어를 묘사할 때 ‘괴수(怪獸)’라는 칭호를 사용하곤 했었는데, CSM*이야말로 가장 유명한 ‘괴수’ 중 하나였다. 이 단어는 고수라는 말보다 더욱 극적인 표현을 위해 ‘괴(怪)’라는 접두어가 덧붙여진 파생어로, ‘굇수’ 또는 ‘ㅚ수’와 같이 다양한 버전으로 변용되며 더욱 강렬하고 아스트랄한 뉘앙스로 초고수 플레이어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리듬 게이머에게 괴수는 유행어 이상으로 게임의 본질과 플레이어의 지향점이 잘 드러나는 단어이기도 하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뉴비든 올드비든 상관없이 리듬 게이머는 괴수를 동경하고, 욕망해왔다. 초기 리듬게임 시장이 아케이드 게임장을 중심으로 발달했을 때부터 리듬 게이머들은 CSM*과 같은 괴수 플레이어가 주로 다니는 오락실을 ‘성지’로 여겼고, 수많은 리듬 게이머들은 굳이 먼 길을 마다않고 원정을 다녔다. 특정한 장소에 기체의 수용 인원을 훌쩍 넘는 게이머가 결집하다 보니, 리듬게임은 ‘볼 거리’라는 새로운 속성을 부여받았다. 괴수의 플레이를 구경하는 것은 하나의 공연을 보는 것과 유사한 경험을 제공했으며, 리듬 게이머들은 ‘미미오락실’과 같은 리듬게임 성지에서 누구보다 가까이 괴수를 바라보고 아이돌처럼 선망할 수 있었다.
아이돌은 꿈을 만들고, 꿈은 도전하는 자를 만든다. CSM*가 같은 초창기 리듬게임 괴수들은 많은 플레이어를 ‘도전자’로 만들었다. 아케이드 리듬 게임의 괴수가 되기 위해서, 게이머는 반복적인 플레이를 통해 숙련된 해석 능력과 신체적 반응을 훈련하여 게임 속 음악과 채보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연습의 과정은 절대 녹록지 않고, 대부분의 게이머는 괴수가 되기를 포기하게 된다. 그들이 괴수가 되지 못한 이유는 다양하다. 단순히 재능이 없었을 수도, 그저 흥미가 떨어졌을 수도 있다. 아케이드 게임의 특성상 굳이 오락실까지 찾아가 자신의 차례를 매너 있게 기다린 후 적지 않은 비용까지 지불해야 하니 과연 실력 향상을 위한 반복적인 훈련이 가능할까 싶은 마음도 들 것이다.
그렇다면 괴수는 과연 어떻게 탄생하는가? 보다 구체적으로 ‘리듬 게이머는 어떻게 실력을 효과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가’라 질문할 수 있다. 다른 게임과 마찬가지로 아케이드 리듬 게임 또한 플레이 타임이 많을수록 자연스럽게 실력이 향상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나 유효한 전략이라고 볼 수는 없다. 처음에는 빠르게 숙련되는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금세 정체되어버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더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는 점은 실력 향상을 목표로 하는 게이머에게 큰 스트레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단순 플레이 타임을 늘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면, 플레이어는 어떤 방식으로 아케이드 리듬 게임을 대해야 할까. 일반적인 리듬 게이머가 괴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극복해야 하는가?
'레퍼토리'에서 벗어나기
플레이어의 실력은 음악에 대응하는 채보를 능숙히 ‘처리’하여 클리어하거나 완벽에 가깝게 연주하여 높은 기록을 달성하는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리듬게임은 근본적으로 채보의 복잡성이 거의 유일한 레벨 디자인이기 때문에, 복잡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패턴을 마주하게 될 경우 유저의 체감 난이도는 급격히 상승하게 된다. 그래서 리듬 게임을 능숙하게 플레이한다는 것은 다양한 패턴이 이미 플레이어에게 내면화되었다는 뜻과 같다. 그렇기에 아케이드 리듬 게이머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패턴에 대한 경험과 대응하는 신체적 훈련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서 리듬게임에 존재하는 수록곡들을 다양하게 플레이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보통의 리듬 게이머는 자신의 기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몇몇 곡들을 매번 반복해서 플레이하기를 좋아해서 실력적 성장의 가능성이 차단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마치 애창곡처럼, 리듬 게이머들도 자신이 즐겨 플레이하는 곡들이 정해져 있다.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음악에 대한 개인적 선호를 제외하면, 게이머는 대부분 재미있고 ‘적절히 도전적인’ 곡을 플레이하고 싶어 한다. 아케이드 리듬 게임은 곡을 선택함에 있어서 플레이어에게 시간제한 외에 어떠한 제약도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유저는 자신의 한계 난이도보다 낮거나, 비슷한 수준의 곡을 선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유저가 레벨 8의 곡을 플레이해서 클리어했다면, 그는 다음 곡 선택 기회에서 레벨 8에 해당하는 곡을 두려움 없이 선택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성장을 목표로 하는 리듬 게이머의 경우, 이러한 과정을 빠르게 반복하여 고난이도에 도달할 수 있으며, 가령 레벨 14의 곡을 클리어했다면 자신의 실력 또한 ‘레벨 14’ 정도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의 자기 실력 인식에는 매우 큰 결함이 존재한다. 특정 난이도에 해당하는 곡의 클리어가 동일한 난이도의 다른 모든 곡의 클리어를 보증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리듬게임은 레벨 디자인을 위해 트릴(trill, 두 음을 빠르게 반복하는 경우), 계단(계단처럼 노트 배치가 이루어진 경우), 데님(노트가 교차되어 마치 거미줄처럼 배치된 경우, 5키 기준으로 ‘135-24'와 같은 구조), 연타(같은 버튼을 연속해서 누르게 노트가 배치된 경우), 롱잡(롱노트를 누른 채 단노트를 함께 처리하게끔 배치된 경우)과 같이 다양한 채보의 배치를 일종의 패턴으로 형식화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각각의 패턴은 모두 다른 신체적 반응을 요구하며, 게임은 유저에게 이를 학습시키기 위해 다양한 음악과 패턴을 낮은 난이도에서부터 고루 배치함으로써 일종의 튜토리얼을 제공한다. 하지만 유저의 우연한 선택에 의해서 특정 패턴에 대한 튜토리얼이 아예 생략된 경우라면, 난이도는 정량화된 숫자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트릴 패턴이 익숙한 ‘레벨 14 플레이어’도 데님 패턴 위주의 ‘레벨 13’ 곡을 클리어하지 못할 수 있고, ‘레벨 13 플레이어’도 연타 패턴이 익숙하다면 연타 위주의 ‘레벨 14’ 혹은 ‘레벨 15’곡도 클리어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리듬게임의 난이도 설계는 플레이어가 결여된 성장을 하게끔 유도한다. 모든 패턴에 대한 내면화가 없이도 특정한 컨셉의 고난이도 곡을 클리어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객관적인 실력이라고 인지하는 일종의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성장’한 게이머에게 지루해 보이는 저난이도의 튜토리얼 곡을 선택할 이유는 많지 않다. 1 코인에 2-3스테이지를 플레이할 수 있는 제한적인 기회에, 더욱이 남들에게 자신의 플레이가 보인다는 아케이드 리듬 게임의 특성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가장 확실하게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레퍼토리’를 반복하게 만들고, 낯선 곡을 ‘초견’하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따라서 가능한 모든 패턴을 내면화하기 위해 되도록 다양한 곡을 플레이하는 것은 실력적 성장에 있어서 가장 유효한 전략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플레이어에게 가장 외면받는 플레이 스타일이 되어버렸다. 허나 괴수가 되기 위해서는 이를 극복해야 한다. 리듬 게임에서 괴수는 곧 모든 곡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이를 가장 완벽에 가깝게 연주할 수 있는 ‘권능’을 두루 갖춘 자를 말한다. 여기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플레이어는 가능한 모든 패턴을 경험하고, 충분히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첫 단추는 다름 아닌 ‘곡 선택’이며, 어제와 다른 곡을 플레이하는 것만으로도 플레이어는 유의미한 실력적 성장이라는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연습이 어려운 아케이드 리듬 게임
리듬 게임도 ‘초견’부터 능숙할 수는 없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필히 연습해야만 한다. 그러나 아케이드 리듬 게임은 플레이어가 연습을 하기에 그다지 좋은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다. 시간과 돈이 필요함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혼자서 기체를 독점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하기 때문에 플레이에 많은 제약이 수반된다. 그중에서 가장 큰 허들은 아케이드 리듬 게임이 반드시 남들에게 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연습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미숙한 모습이기 때문에, 자신의 플레이가 타인에게 ‘볼 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게이머에게 생각보다 큰 문제로 다가온다.
리듬게임에서 연습은 카오스처럼 느껴지는 채보를 패턴화하고 이를 신체적으로 반응하기 위해 훈련을 반복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특정 패턴에 대한 숙련도가 부족할수록 신체적 반응 또한 미숙해지기 때문에 이를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은 꽤나 중요하다. 히지만 게임은 연습의 과정에 있는 플레이어가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 버린다. 화면 속 그래픽, 스피커를 통해 퍼지는 어긋난 음악소리, 미숙한 몸짓과 타건음까지 모든 정보들은 플레이어가 ‘연습 중’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아케이드 리듬 게임의 대표적인 불문율로 비숙련자가 플레이를 하고 있거나 자리를 비켰을 때, 숙련자가 옆에서 또는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곡을 플레이하거나 더욱 어려운 곡을 플레이해서는 안된다는 규칙이 있다. 비교적 ‘못 한다’는 사실이 공연히 드러났을 때 느껴지는 창피함이 플레이를 주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노래방에서 내가 이미 부른 곡을 옆방에서 똑같이 선택하여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우리는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아케이드 리듬게임장은 마치 칸막이가 없는 코인노래방과 같다. 모두가 어떤 곡을 선택했는지, 잘 하는지 못하는지가 공연히 드러나기 때문에 연습이 필요한 유저도 바로 무대에 오르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리듬 게임의 플레이는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다. 아케이드 공간에서 자신의 부족한 실력이 무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은 플레이어의 심리적 장벽으로 작용한다. 이로 인해 꽤 많은 플레이어는 연습 또는 ‘초견’ 자체를 주저하게 되고, 더욱 성장하기 위한 중요한 단계에서 좌절을 하거나 포기하기도 한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리듬 게임을 지속적으로 즐기고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동시에 가장 큰 두려움이자 난관이라 할 수 있다.
비주류 음악을 내면화하기
괴수가 되기 위해 플레이어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은 어쩌면 리듬 게임에 수록된 음악을 사랑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어떤 곡을 플레이하더라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강한 몰입’ 상태에 돌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듬게임의 플레이 설계는 근본적으로 음악에 좌우되므로, 게임에 수록된 다양한 음악에 대한 이해는 곧 최선의 플레이를 위해 내가 수행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로 직결된다. 그렇기에 내가 플레이하는 음악이 형식적으로 익숙하고 심지어 선호될 경우 도전에 대한 심리적 장벽도 낮아질뿐더러 실제로 더 좋은 플레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보통 리듬게임은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규칙을 학습시키는 ‘입문곡’에서부터 최종 도전과제에 해당하는 ‘보스곡’까지 점진적인 단계로 곡을 수록한다. 캐주얼한 레벨의 수록곡은 130 BPM 근처의 팝 혹은 하우스 음악[Stay, EZ2DJ The 1st Tracks(1999)]과 같이 비교적 대중음악에 가깝게 제공되는 경우가 많지만, 플레이어를 도전케하는 고난이도의 수록곡은 200 BPM이 훌쩍 넘어가는 극단적으로 빠른 음악이거나[冥(Mei), beatmania llDX 12 HAPPY SKY(2005)], 아예 곡 중간에 BPM의 변화가 존재하는 등[Fascination MAXX, Dance Dance Revolution(2006)] 플레이어가 드물게 접해 본 난해한 구성으로 설계되곤 한다. 이처럼 리듬게임 플레이어는 실력에 따라 더욱 어려운 채보를 접하게 될 뿐만 아니라 흔히 들어보지 못했던 비주류 장르의 음악을 듣게 된다. 즉, 괴수가 되기 위해서는 비주류 음악의 세계에 반드시 발을 딛어야 한다.
억지스럽지 않은 고난이도 채보의 개발을 위해서 리듬게임은 애초에 악기의 밀도가 높고 박자가 복잡한 장르를 ‘보스곡’으로 차용하고 싶어 한다. 대표적으로 폴리리듬(Polyrhythm)이 기반이 되는 브레이크비트 계열의 드럼앤베이스, 정글, 하드코어 테크노가 대표적이고, 또는 빠른 BPM과 속도감 있는 멜로디의 트랜스 계열 일렉트로니카도 사랑받는 장르 중 하나이다. 더욱이 개발자가 의도적으로 개성을 부여하고자 할 경우 아예 들어본 적 없는 독창적인 음악이 탄생하기도 한다. 주로 빠른 BPM과 함께 심하게 왜곡된 악기 사운드가 특징인 ‘하드코어 테크노’를 기반으로 리듬게임은 ‘보스곡’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전자음 대신 고딕이나 르네상스 스타일을 연상케하는 현악기나 피아노를 활용하여 웅장한 느낌을 연출하거나, 일본의 ‘아니메’ 혹은 ‘보컬로이드’ 계의 동인문화 요소를 삽입하여 특유의 매니악함을 활용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처럼 독창적인 플레이 경험을 위해 리듬게임의 수록곡은 음악의 구조적 특성 자체가 독특할 것을 요구받는다. 실력이 상승하고 더 많은 콘텐츠를 탐닉할수록 플레이어는 점점 더 복잡하고 낯선 음악적 요소를 수반하는 곡을 마주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이런 비주류 장르를 ‘듣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생긴다. 그렇기에 리듬게임의 괴수가 되는 것은 곧 비주류 음악의 세계를 탐험하는 과정과 다름없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통해 흔히 접해보기 힘들거나 오직 리듬 게임에서만 존재하는 음악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음악들을 내면화 하고 싶은 욕구야말로 괴수의 본능일 것이다.
괴수라는 문화적 정체성
‘리듬 게임의 괴수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나름의 방안을 제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수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필자 또한 20년이 넘게 노력했지만 근처에도 가볼 수 없었으므로). 다만 괴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리듬 게임을 본질적으로 가장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제안하고 싶을 뿐이다. 괴수는 단순히 기술적 상징이 아니라 아케이드 리듬 게임의 문화적 정체성이다. 리듬 게임을 좋아한다면 한번쯤 사뭇 진지하게 괴수가 되어보려는 시도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